현대의 만병통치약은 바로 달리기 입니다”
방광암에 걸린 수의사가 있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난치병이었다. 40대 초반의 한창 일할 나이. 그러나 그는 의사의 권유를 좇아 방광을 떼어 내지도 않았고, 쉽사리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항암 치료를 받는 한편 그가 매달린 건 달리기였다. 처음 풀코스를 완주하자 신기하게도 방광의 모세혈관이 선홍색으로 되살아났다. 암의 공격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다음은 마라톤을 통해 제2의 인생을 누리고 있는 이종덕씨의 인간 승리 스토리다.
지난 1998년 7월, 소변을 보던 수의사 이종덕(47)씨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밑을 쳐다보니 소변에 피가 조금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가, 아니면 전날 과음을 했기 때문인가?’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수롭잖게 여기기로 했다. 그런데 잔뇨에서 혈뇨가 발견되는 일이 며칠 간격을 두고 계속됐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몸을 다룬다는 점만 다를 뿐, 그의 직업도 의사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같은 해 9월, 한 종합병원을 찾아 조직검사 등을 포함한 정밀검진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광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그것도 2기라는 판정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어떻게 암 같은 난치병이 자신에게 생길 수 있는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오진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좀더 큰 종합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방광암 2기니까 방광을 떼어낸 뒤 옆구리에 오줌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차거나, 장을 일부 절제해서 방광 자리에 붙이거나 선택하라”는 것이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건 항상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하는 참담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검사 결과를 알고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아내(윤정순·43·서울 도봉중 미술교사)를 보니까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울다보니 당시 돌이 갓 지난 막내딸(향아·초등학교 1학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늦둥이 딸을 위해서도 허무하게 삶을 포기할 순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우선 방광 절제 수술을 거부했다. 아내는 “당신도 의사인데, 왜 의사의 말을 안 듣느냐?”며 야단이었지만, 암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고 장기의 일부를 포기하긴 너무 억울했다. 그 종합병원에서 퇴원한 뒤 찾은 곳은 서울대병원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정밀검사 결과 방광암 1기라는 판정이 나왔다. 서울대병원 측에서는 “지금 당장 방광을 떼어낼 필요는 없고, 방광에 있는 암 돌기를 긁어내는 수술을 한 뒤 항암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1차수술 뒤 담배 피우자 암 재발
1998년 10월 중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암에 걸린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았다.
그는 경기도 포천에서 동물병원을 하는 한편 동물 약품 도매업을 병행했다. 동물병원을 개업하기 전에 다니던 직장은 바이엘 코리아였다. 3년 동안 다닌 바이엘 코리아에서 1팀장을 맡았을 때 담당한 지역이 포천을 중심으로 한 한강 이북 지역이어서 이곳에 개업하게 됐다. 가축의 질병을 치료하는 한편 농장 등에 동물 약품을 공급했다. 일의 규모는 아무래도 동물병원보다 약품 공급사업이 더 컸다.
그런데 이 약품 도매업이 1997년 외환 위기로 국가 경제가 흔들릴 때 큰 타격을 입었다. 어음을 받거나, 그동안 익힌 안면으로 공급한 약품 값을 회수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그동안 적지 않은 불량 채권들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게 암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듯했다.
술, 담배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술과 술 마시는 분위기를 꽤 좋아했다(술은 지금도 안 끊고 있다). 특히 25년 동안 하루 한 갑 반 가량 피워온 담배의 해악이 발병의 큰 원인일 것 같았다.
담당 의료진의 설명이나, 입원해 있는 동안 공부한 결과에 따르면 방광암은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뇨 이외에는 특별한 자각 증상이 없었다. 다른 장기로의 전이율은 낮은 반면 재발률은 다른 종류의 암보다 월등히 높았다. 특히 담배를 피우면 99% 재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때만 해도 ‘퇴원하면 반드시 금연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방광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산부인과의 분만 틀 비슷한 기구에 누워서 받는 내시경 검사는 무척 고통스럽다. 아픔을 참으면서 그는 모니터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방광 상태는 괜찮은 것 같았다. 의사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관리를 잘해주면 재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병원을 나선 뒤 그는 한동안 참았던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그가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담배가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것이다. 세 군데 병원을 다니며 두 달 동안 입원했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이제 별일 없을 거라는 자만심도 한몫 거들었다. 물론 항암 치료도 받지 않았다.
암 세포는 흡연 욕구 못지않게 끈질기고, 담배의 독성은 한 개비나 한 갑이나 똑같다. 흡연 양을 하루 반 갑으로 줄였어도 암 세포는 스토커처럼 그를 물고늘어졌다. 1년 뒤인 1999년 9월 다시 혈뇨가 시작됐고, 서울대병원에서 방광암 재발 판정을 받았다. 재발 결과를 의사로부터 통보 받은 날, 그는 병원을 나서며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날 이후로 그는 담배를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같은 달, 전기 인두로 방광의 암 돌기를 없애는 2차 수술을 받은 뒤에는 항암 치료를 본격적으로 받았다. 처음 두 달은 1주일에 한 번씩 호스로 방광에 항암제를 주입하고, 나머지 10개월은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치료를 받는 1년 코스의 항암 치료였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비로소 운동을 시작했다. 공기 좋은 산을 찾아 올랐고, 헬스클럽에도 등록해 근력 강화운동을 했다. 담배를 끊고 항암 치료를 받자 체중이 76kg까지 불었다. 163cm인 그의 키에 비하면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몸무게였다. 등산과 근력운동을 통해 체중을 줄이다 보면 자연히 암세포도 그에게서 멀어질 것 같았다.
1, 2차 수술을 받으며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다행히 암 보험을 들어놓은 게 있어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치료를 받는 중에는 일을 할 수 없어서 돈벌이를 못 했던 그는 어느 날 아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1년만 일을 쉬어도 될까? 산에 다니고 운동하면 병을 완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며 미안해하는 그에게 아내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판인데, 생활은 자신의 월급으로 꾸려가면 된다는 것이 고마운 아내의 대답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그는 동물병원의 문을 닫았다. 회수가 안 되던 채권도 잊어버리기로 했다. 재물을 늘리고 싶은 욕심이 스트레스를 낳았고, 그 스트레스가 결국 암을 발병시켰으니까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이 참에 끊자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그리곤 열심히 산행을 했다.
2개월이 지나자 슬슬 답답함이 밀려왔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허구한 날 놀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출장 진료를 하는 컨설팅 병원이었다. 컨설팅 병원이란, 삼양사·농협 등의 대기업과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가축을 돌보는 일이었다. 조류 질병, 그 중에서도 부검 전문인 그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지방 출장이 많은 일이었지만, 채권 회수 등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헬스클럽을 다니긴 했지만, 트레드밀(러닝머신)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걷는 운동은 등산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자 종종 등산을 거르는 일이 생겼다. 트레드밀에 올라선 건 순전히 걷기운동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2002년 9월, 트레드밀을 처음 이용한 그날부터 그의 인생이 개벽의 순간처럼 바뀌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작년 3월 처음으로 풀코스 완주
처음에는 걷기부터 시작했다. 산행으로 다진 체력이 있어서 40분 가량 걷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점차 걷는 시간과 거리를 늘려갔다. 그러다 보니 옆의 트레드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사람들이 슬슬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체중이 많이 줄긴 했지만, 아직도 성에 안 찰 때여서 체지방을 더 빼고싶은 욕심도 났다. 걸음걸이를 조금 빨리 하며 뛰기 시작한 게 2003년 1월의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자 몸무게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숨을 헉헉거리며 뛰다보면 스트레스가 사라지면서 심리적인 안정이 찾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달리기 관련 공부를 하면서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유심히 읽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게시판 글을 보니까 ‘달리기 중독자’들이 무척 많았다.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건강한 중독자들….
만년설이 덮인 히말라야의 고산을 정복한 것 같은 그들이 우러러보이면서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자신도 체력과 의지의 극한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암의 공포에서도 완전히 해방될 것 같았다.
몸무게가 67kg까지 줄어든 2003년 2월 15일, 10km 대회에 처음 도전장을 내밀었다. 46분. 첫 도전치고는 좋은 완주 기록이었다. ‘타고난 마라토너인지도 모르겠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생겼다. 2주 뒤인 3월 1일, 서울마라톤대회에선 하프코스에 도전해 1시간39분에 완주했다. 인터넷을 통해 마라톤을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중상급자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미 4주 뒤인 3월 30일에 열리는 코리아 오픈 마라톤대회의 풀코스 참가 신청을 해놓은 터. 이제는 뛸 일만 남았다.
연습량이 적지 않은 새내기 도전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오버페이스이다. 10km와 하프 마라톤의 기록이 괜찮았던 그는 첫 풀코스의 목표를 완주가 아니라 ‘3시간30분 골인’으로 잡았다. 목표 시간에 맞춰 5km 단위로 시간을 분배한 페이스 차트를 오른쪽 손목에 차고 그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부근에 마련된 스타트 라인을 힘차게 출발했다. 반환점까지는 페이스 차트대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은 32km 이후부터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그날 뼈저리게 절감해야 했다.
32km 지점을 지나자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고,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뛰는 것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럴수록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강렬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들어 버리면 담배도 다시 피울 것 같았고, 지금은 잠잠해진 암의 공격도 재개될 듯싶었다.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막내, 그리고 처남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무거운 다리를 힘겹게 앞으로 옮겼다. 드디어 골인 지점에 설치된 매트를 밟았다. 왼쪽 손목에 차고있던 시계는 3시간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올봄, 서브3에 도전하겠다”
첫 마라톤을 완주하고 며칠 뒤 그는 다시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재발 여부를 확인하는 방광 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방광의 모세혈관들이 20대 청년의 그것처럼 선홍색으로 되살아나 있었다. 혈액순환에는 홍삼이 가장 좋지만, 그 홍삼보다도 더 효과적인 게 2시간 안팎의 유산소운동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론으로만 들었던 걸 자신의 몸을 통해 확인하니 신비롭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도 “그것 참…”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요즘 그는 완전히 ‘마라톤 전도사’가 돼버렸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아주고, 생활을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마라톤교(敎)에 벌써 20여명을 입문시켰다. 스스로 동호회를 만들기까지 했다. 마라톤 사이트 런다이어리(약칭 런다, www.rundiary. co.kr)에서 활동하던 그는 지난 2월 초, 런다 중달모(중랑천 달리기모임)의 결성을 주도한 것이다. 현재 회원이 54명인 이 모임에서 그는 현재 임시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1주일에 4일 가량 달린다. 이틀은 헬스클럽의 트레드밀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하루(수요일)는 중달모 회원들과 12km를 달리며, 일요일에는 장거리 훈련을 한다. 부상 우려가 높은 인터벌 훈련은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1주일에 70km 가량, 한 달이면 300km 정도를 달리는 훈련량으로 지난 3월의 동아 서울국제마라톤에선 3시간18분51초의 개인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얼마 전까지 방광에 암세포를 달고 살았던 환자가 마라톤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주변에 보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운동을 권하고 싶습니다. 몰라보게 건강해진 저를 보세요? 등산이나 달리기 같은 유산소운동은 현대인에게 바로 만병통치약이거든요.”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은 아무래도 ‘서브3’이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려는 이 꿈을 그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는 3월 13일 열리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그는 여기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날,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잠실 종합운동장의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낼 생각이다.
서브3를 이루건 못 이루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격려를 보내고 싶은 것은, 지난 6년 동안 암과의 싸움에서 결코 무릎 꿇지 않은 그 자신이 너무 대견스럽기 때문이다. 암과의 마라톤에서 승자의 모습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종덕 암 발병 및 치료일지]
·1998년 7월 잔뇨에서 혈뇨 발견
·1998년 10월 중순 서울대병원에서 1차 수술
·1999년 9월 재발, 서울대병원에서 2차 수술
·1999년 9월부터 1년간 항암 치료
·1차 수술 뒤 등산과 헬스클럽에서의 근력운동 병행
·2002년 9월부터 트레드밀에서 40분씩 걷기 시작
·2003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트레드밀 달리기 시작
·2003년 2∼3월에 10km와 하프 마라톤, 풀코스 각각 처음 완주
·2004년 12월 현재 방광암 완치 상태
방광암에 걸린 수의사가 있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난치병이었다. 40대 초반의 한창 일할 나이. 그러나 그는 의사의 권유를 좇아 방광을 떼어 내지도 않았고, 쉽사리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항암 치료를 받는 한편 그가 매달린 건 달리기였다. 처음 풀코스를 완주하자 신기하게도 방광의 모세혈관이 선홍색으로 되살아났다. 암의 공격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다음은 마라톤을 통해 제2의 인생을 누리고 있는 이종덕씨의 인간 승리 스토리다.
지난 1998년 7월, 소변을 보던 수의사 이종덕(47)씨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밑을 쳐다보니 소변에 피가 조금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가, 아니면 전날 과음을 했기 때문인가?’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수롭잖게 여기기로 했다. 그런데 잔뇨에서 혈뇨가 발견되는 일이 며칠 간격을 두고 계속됐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몸을 다룬다는 점만 다를 뿐, 그의 직업도 의사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같은 해 9월, 한 종합병원을 찾아 조직검사 등을 포함한 정밀검진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광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그것도 2기라는 판정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어떻게 암 같은 난치병이 자신에게 생길 수 있는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오진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좀더 큰 종합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방광암 2기니까 방광을 떼어낸 뒤 옆구리에 오줌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차거나, 장을 일부 절제해서 방광 자리에 붙이거나 선택하라”는 것이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건 항상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하는 참담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검사 결과를 알고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아내(윤정순·43·서울 도봉중 미술교사)를 보니까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울다보니 당시 돌이 갓 지난 막내딸(향아·초등학교 1학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늦둥이 딸을 위해서도 허무하게 삶을 포기할 순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우선 방광 절제 수술을 거부했다. 아내는 “당신도 의사인데, 왜 의사의 말을 안 듣느냐?”며 야단이었지만, 암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고 장기의 일부를 포기하긴 너무 억울했다. 그 종합병원에서 퇴원한 뒤 찾은 곳은 서울대병원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정밀검사 결과 방광암 1기라는 판정이 나왔다. 서울대병원 측에서는 “지금 당장 방광을 떼어낼 필요는 없고, 방광에 있는 암 돌기를 긁어내는 수술을 한 뒤 항암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1차수술 뒤 담배 피우자 암 재발
1998년 10월 중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암에 걸린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았다.
그는 경기도 포천에서 동물병원을 하는 한편 동물 약품 도매업을 병행했다. 동물병원을 개업하기 전에 다니던 직장은 바이엘 코리아였다. 3년 동안 다닌 바이엘 코리아에서 1팀장을 맡았을 때 담당한 지역이 포천을 중심으로 한 한강 이북 지역이어서 이곳에 개업하게 됐다. 가축의 질병을 치료하는 한편 농장 등에 동물 약품을 공급했다. 일의 규모는 아무래도 동물병원보다 약품 공급사업이 더 컸다.
그런데 이 약품 도매업이 1997년 외환 위기로 국가 경제가 흔들릴 때 큰 타격을 입었다. 어음을 받거나, 그동안 익힌 안면으로 공급한 약품 값을 회수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그동안 적지 않은 불량 채권들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게 암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듯했다.
술, 담배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술과 술 마시는 분위기를 꽤 좋아했다(술은 지금도 안 끊고 있다). 특히 25년 동안 하루 한 갑 반 가량 피워온 담배의 해악이 발병의 큰 원인일 것 같았다.
담당 의료진의 설명이나, 입원해 있는 동안 공부한 결과에 따르면 방광암은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뇨 이외에는 특별한 자각 증상이 없었다. 다른 장기로의 전이율은 낮은 반면 재발률은 다른 종류의 암보다 월등히 높았다. 특히 담배를 피우면 99% 재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때만 해도 ‘퇴원하면 반드시 금연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방광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산부인과의 분만 틀 비슷한 기구에 누워서 받는 내시경 검사는 무척 고통스럽다. 아픔을 참으면서 그는 모니터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방광 상태는 괜찮은 것 같았다. 의사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관리를 잘해주면 재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병원을 나선 뒤 그는 한동안 참았던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그가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담배가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것이다. 세 군데 병원을 다니며 두 달 동안 입원했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이제 별일 없을 거라는 자만심도 한몫 거들었다. 물론 항암 치료도 받지 않았다.
암 세포는 흡연 욕구 못지않게 끈질기고, 담배의 독성은 한 개비나 한 갑이나 똑같다. 흡연 양을 하루 반 갑으로 줄였어도 암 세포는 스토커처럼 그를 물고늘어졌다. 1년 뒤인 1999년 9월 다시 혈뇨가 시작됐고, 서울대병원에서 방광암 재발 판정을 받았다. 재발 결과를 의사로부터 통보 받은 날, 그는 병원을 나서며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날 이후로 그는 담배를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같은 달, 전기 인두로 방광의 암 돌기를 없애는 2차 수술을 받은 뒤에는 항암 치료를 본격적으로 받았다. 처음 두 달은 1주일에 한 번씩 호스로 방광에 항암제를 주입하고, 나머지 10개월은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치료를 받는 1년 코스의 항암 치료였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비로소 운동을 시작했다. 공기 좋은 산을 찾아 올랐고, 헬스클럽에도 등록해 근력 강화운동을 했다. 담배를 끊고 항암 치료를 받자 체중이 76kg까지 불었다. 163cm인 그의 키에 비하면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몸무게였다. 등산과 근력운동을 통해 체중을 줄이다 보면 자연히 암세포도 그에게서 멀어질 것 같았다.
1, 2차 수술을 받으며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다행히 암 보험을 들어놓은 게 있어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치료를 받는 중에는 일을 할 수 없어서 돈벌이를 못 했던 그는 어느 날 아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1년만 일을 쉬어도 될까? 산에 다니고 운동하면 병을 완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며 미안해하는 그에게 아내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판인데, 생활은 자신의 월급으로 꾸려가면 된다는 것이 고마운 아내의 대답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그는 동물병원의 문을 닫았다. 회수가 안 되던 채권도 잊어버리기로 했다. 재물을 늘리고 싶은 욕심이 스트레스를 낳았고, 그 스트레스가 결국 암을 발병시켰으니까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이 참에 끊자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그리곤 열심히 산행을 했다.
2개월이 지나자 슬슬 답답함이 밀려왔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허구한 날 놀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출장 진료를 하는 컨설팅 병원이었다. 컨설팅 병원이란, 삼양사·농협 등의 대기업과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가축을 돌보는 일이었다. 조류 질병, 그 중에서도 부검 전문인 그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지방 출장이 많은 일이었지만, 채권 회수 등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헬스클럽을 다니긴 했지만, 트레드밀(러닝머신)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걷는 운동은 등산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자 종종 등산을 거르는 일이 생겼다. 트레드밀에 올라선 건 순전히 걷기운동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2002년 9월, 트레드밀을 처음 이용한 그날부터 그의 인생이 개벽의 순간처럼 바뀌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작년 3월 처음으로 풀코스 완주
처음에는 걷기부터 시작했다. 산행으로 다진 체력이 있어서 40분 가량 걷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점차 걷는 시간과 거리를 늘려갔다. 그러다 보니 옆의 트레드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사람들이 슬슬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체중이 많이 줄긴 했지만, 아직도 성에 안 찰 때여서 체지방을 더 빼고싶은 욕심도 났다. 걸음걸이를 조금 빨리 하며 뛰기 시작한 게 2003년 1월의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자 몸무게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숨을 헉헉거리며 뛰다보면 스트레스가 사라지면서 심리적인 안정이 찾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달리기 관련 공부를 하면서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유심히 읽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게시판 글을 보니까 ‘달리기 중독자’들이 무척 많았다.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건강한 중독자들….
만년설이 덮인 히말라야의 고산을 정복한 것 같은 그들이 우러러보이면서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자신도 체력과 의지의 극한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암의 공포에서도 완전히 해방될 것 같았다.
몸무게가 67kg까지 줄어든 2003년 2월 15일, 10km 대회에 처음 도전장을 내밀었다. 46분. 첫 도전치고는 좋은 완주 기록이었다. ‘타고난 마라토너인지도 모르겠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생겼다. 2주 뒤인 3월 1일, 서울마라톤대회에선 하프코스에 도전해 1시간39분에 완주했다. 인터넷을 통해 마라톤을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중상급자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미 4주 뒤인 3월 30일에 열리는 코리아 오픈 마라톤대회의 풀코스 참가 신청을 해놓은 터. 이제는 뛸 일만 남았다.
연습량이 적지 않은 새내기 도전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오버페이스이다. 10km와 하프 마라톤의 기록이 괜찮았던 그는 첫 풀코스의 목표를 완주가 아니라 ‘3시간30분 골인’으로 잡았다. 목표 시간에 맞춰 5km 단위로 시간을 분배한 페이스 차트를 오른쪽 손목에 차고 그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부근에 마련된 스타트 라인을 힘차게 출발했다. 반환점까지는 페이스 차트대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은 32km 이후부터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그날 뼈저리게 절감해야 했다.
32km 지점을 지나자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고,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뛰는 것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럴수록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강렬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들어 버리면 담배도 다시 피울 것 같았고, 지금은 잠잠해진 암의 공격도 재개될 듯싶었다.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막내, 그리고 처남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무거운 다리를 힘겹게 앞으로 옮겼다. 드디어 골인 지점에 설치된 매트를 밟았다. 왼쪽 손목에 차고있던 시계는 3시간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올봄, 서브3에 도전하겠다”
첫 마라톤을 완주하고 며칠 뒤 그는 다시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재발 여부를 확인하는 방광 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방광의 모세혈관들이 20대 청년의 그것처럼 선홍색으로 되살아나 있었다. 혈액순환에는 홍삼이 가장 좋지만, 그 홍삼보다도 더 효과적인 게 2시간 안팎의 유산소운동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론으로만 들었던 걸 자신의 몸을 통해 확인하니 신비롭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도 “그것 참…”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요즘 그는 완전히 ‘마라톤 전도사’가 돼버렸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아주고, 생활을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마라톤교(敎)에 벌써 20여명을 입문시켰다. 스스로 동호회를 만들기까지 했다. 마라톤 사이트 런다이어리(약칭 런다, www.rundiary. co.kr)에서 활동하던 그는 지난 2월 초, 런다 중달모(중랑천 달리기모임)의 결성을 주도한 것이다. 현재 회원이 54명인 이 모임에서 그는 현재 임시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1주일에 4일 가량 달린다. 이틀은 헬스클럽의 트레드밀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하루(수요일)는 중달모 회원들과 12km를 달리며, 일요일에는 장거리 훈련을 한다. 부상 우려가 높은 인터벌 훈련은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1주일에 70km 가량, 한 달이면 300km 정도를 달리는 훈련량으로 지난 3월의 동아 서울국제마라톤에선 3시간18분51초의 개인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얼마 전까지 방광에 암세포를 달고 살았던 환자가 마라톤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주변에 보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운동을 권하고 싶습니다. 몰라보게 건강해진 저를 보세요? 등산이나 달리기 같은 유산소운동은 현대인에게 바로 만병통치약이거든요.”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은 아무래도 ‘서브3’이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려는 이 꿈을 그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는 3월 13일 열리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그는 여기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날,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잠실 종합운동장의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낼 생각이다.
서브3를 이루건 못 이루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스스로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격려를 보내고 싶은 것은, 지난 6년 동안 암과의 싸움에서 결코 무릎 꿇지 않은 그 자신이 너무 대견스럽기 때문이다. 암과의 마라톤에서 승자의 모습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종덕 암 발병 및 치료일지]
·1998년 7월 잔뇨에서 혈뇨 발견
·1998년 10월 중순 서울대병원에서 1차 수술
·1999년 9월 재발, 서울대병원에서 2차 수술
·1999년 9월부터 1년간 항암 치료
·1차 수술 뒤 등산과 헬스클럽에서의 근력운동 병행
·2002년 9월부터 트레드밀에서 40분씩 걷기 시작
·2003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트레드밀 달리기 시작
·2003년 2∼3월에 10km와 하프 마라톤, 풀코스 각각 처음 완주
·2004년 12월 현재 방광암 완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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