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곤충학자가 개미들의 집단생활의 생태에 대하여 연구를 하다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개미들의 생활을 관찰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놈들에게서 생김새나 몸집, 생활습관과 신체적 특성 따위를 찾아내어 이눔과 저눔을 구분하는 일은 엄청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명주실 같은 개미의 허리나 좁쌀만한 개미의 등짝에 표식을 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곤충학자는 일단의 개미집단을 몇날 며칠동안 관찰한 결과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중요한 이론을 발견하게 이른다.
이 곤충학자도 처음에는 개미들의 집단생활이 참으로 단순한 반복의 연속이라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단지,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어떤 규칙이나 역할 분담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관찰을 시작했겠지만, 오랫동안 개미집단을 하면서 이 곤충학자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분도 있겠지만, 개인이나 기업구조의 혁신 교육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이륙이(2-6-2)의 법칙이 이 개미의 집단생활을 관찰에서 비롯된 이론이다. 이 곤충학자는 이륙이의 법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00마리의 개미들이 개미굴을 드나들며 열심히 먹이를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 중에서 20마리는 개미집단의 전체 생존을 위하여 아주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하여 먹이를 나르고 60마리는 일을 하기는 하되 적당히, 일하는 개미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하고, 나머지 20마리는 일을 하지 않고 빈둥빈둥 거리면서 다른 개미들이 물어다 놓은 먹이를 축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열심히 일하던 개미 중 한 마리가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개미의 집단으로 이동하여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일을 하지 않는 집단의 개미 중에 한 마리가 일하는 개미의 집단으로 옮겨가서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동은 이(2)와 육(6)의 사이에서, 육(6)과 이(2)의 사이에서, 또는 이(2)와 이(2)의 사이에서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개체간의 이동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륙이(2-6-2)의 비율이 일정하게 존재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불행히도 이 곤충학자는 이 원인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내가 개미가 되어 개미들의 의식세계를 경험해 보지도 못한 채,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이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일련의 규칙적인 비율과 이 비율을 유지하기 위한 개체들 간의 이동이 그들의 생존 본능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이미, 그들 전체의 개체들이 필요로 하는 먹이의 양과 노동량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의 개체들에게 필요한 먹이와 노동량을 비교 분석하면서 부족한 노동량을 그들 나름의 질서에 의해 본능적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은 상황의 변화라는 필연적인 요소에 의해 더욱 명확해 진다고 본다.
이 곤충학자는 이러한 사실의 발견에 그치지 않고, 재미있는 실험을 하게 된다. 일을 열심히 하는 노동력 상위의 20마리의 개미를 따로 떼어 놓고 관찰하였더니, 그 중에서도 이 이륙이(2-6-2)의 법칙대로 개미들이 움직이더라는 것이다. 즉, 열심히 일하던 20마리의 개미중에서 네 마리는 열심히 먹이를 나르면서 변함없이 열심히 일하지만, 열두 마리는 점점 게을러 지더니 대충 움직이면서 눈치만 살피고, 나머지 네 마리는 일을 하지 않고 먹이만 축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충 일을 하는 60마리의 개미와 일을 하지 않고 놀고먹는 개미 20마리를 각각 떼어 놓고 관찰하였더니 놀랍게도 일을 대충하는 60마리의 개미들과 일을 하지 않고 빈둥대던 20마리의 개미들 사이에서도 이런 이륙이(2-6-2)의 법칙이 자연스럽게, 똑같이 재현되어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대충 개기기만 하는 개미, 놀고먹는 개미들이 이(2)와 육(6)과 이(2)의 비율로 분리되더란 말이다.
나는 이 이륙이(2-6-2)의 법칙에 대한 자료를 대하고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이론을 반박할 만큼의 어떤 경험적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지만, 내가 속한 직장도 이 이륙이의 법칙에서 전혀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간 내가 거쳐 왔던 학교나 동창회 모임, 마라톤 클럽에서도 이 이륙이의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 나아가 나는 마라톤 대회에서서도 이 이륙이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이륙이의 법칙을 마라톤 대회에 적용해 보자. 1000명이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가 있다면 이 중에서 200명은 정말 쌔가 빠지도록 열심히 달린다. 그리고 600명 정도는 쌔가 빠지게는 아니지만, 그냥 저냥 즐기면서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머지 200명은 완주를 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 이라는 생각으로 걷다가 뛰가다를 반복하며 욕심을 버리고 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위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연습을 게을리 한 누군가가 가운데의 육(6)이나 뒤처진 이(2)의 위치로 밀려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연습한 누군가는 가운데 육(6)이나 앞선 이(2)의 위치로 치고 올라갈 수도 있다. 나는 이 위치 위동에 대한 비율은 언제나 변함이 없어서 항상 이륙이(2-6-2)의 비율을 유지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달리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충 달리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달리지 못하는 웃기는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곤충학자가 곤충을 따로 떼어 놓고 관찰을 하였듯이 쌔가 빠지게 열심히 달리는 200명의 마라토너들을 따로 떼어 놓고 그들만의 레이스를 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즐기면서 달리는 600명의 마라토너들과 아무런 욕심 없이 달리는 후미의 200명을 따로 떼어 놓고 레이스를 하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물론, 레이스에 참가한 동일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특성을 알려 주어야 한다. 개미들이 그들의 환경 변화를 인지한 후에, 서로의 노동 생산성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라톤 기록과 연습량, 기록에 대한 집착의 정도 등을 미리 알려 주어야 한다. 물론, 이 사람들이 어떤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실험에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하여 최소한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서로의 달리기 능력과 상황의 변화를 인지한다면 즉,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달리기라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륙이의 비율에 의해 나뉘어 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모두가 잘 달리기란 불가능하고 모두가 대충 달릴 수도 없으며, 모두가 잘 달리지 못하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잘 달리는 상위 20퍼센트의 쌔가 빠지게 사람들과 대충 달리는 가운데 60퍼센트의 사람들도, 완주와 포기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하위 20퍼세트의 사람들도 노력 여하에 따라 서로 간에 일정한 비율로 자리 변동이 있을 것이고 이 자리변동은 항상 일정하게 이륙이(2-6-2)의 비율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 비율을 나누는 기준점에 있어서 다소의 변동은 있을 수 있겠으나 이륙이의 비율이 일팔일(1-8-1)이나 삼사삼(3-4-3)의 비율로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개미들처럼 상대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처한 위치가 상위 20퍼센트이라고 해서 우쭐해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가운데 60퍼센트나 하위 20퍼센트라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언제나 자리이동이 가능하다. 나도 한때는 상위 15퍼센트 안에 드는 기록으로 우쭐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위 15퍼센트를 겨우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이다. 일하는 개미와 일하지 않는 개미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본능적으로 자리이동을 하듯이 우리의 마라톤 기록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자리 이동이 가능하다.
모두가 열심히 달릴 수는 없다. 그리고 모두가 달리기를 게을리 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열심히 달리고 싶어 하고 누구나 게으름을 경계하지만, 우리는 이륙이의 이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생태학적인 비율의 굴레 속에 갇혀 있는 개미와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개미들처럼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 집단 안에서 우글거리는 하나의 작은 개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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