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달림이가 되게 하소서.

이런 달림이가 되게 하소서...

                                            --- 정 현수 ---

근육이 만신창이 되어 고통스러운
사점(死點)의 순간에서도
내 가족의 웃음과
내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는 여유를 허락하시고

달리면서 맛 보는 행복한 고통은
세상살이의 고통중에 하나일 뿐이며
달려온 거리 만큼이나 많은 고통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마라톤에 대한 도전과 완주보다
그 과정을 충실히 준비하는
지치지 않는 성실함이
더 귀중함을 알게 하시고

그 도전이 두려움과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낙담하거나 자책하여 주저 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는
용기를 허락 하소서...



달릴 수 있는 육체를 가진 것만으로도
하늘과 스스로에게 감사해 하며
행여나, 건강한 육체가 나의 자랑인양
뽐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시고

반복되는 일상의 풍파 속에서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한
현실도피의 도구로서
달리기를 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남보다 조금 빠른 달리기 기록을
인생의 기록인양 거만해 하며
주로에서 남을 향해 으시대는
치졸한 부끄러움을 모르게 하여 주시고

주로에 쓰러져 신음하는 달림이를
기록과 완주를 뒤로하고 일으켜 세워
구령 붙이며 같이 달릴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허락 하소서...



힘들게 달려온 먼 거리 만큼이나
고통을 극복한 스스로를 아름다워 하며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이 몸이 늙어 달릴 힘이 없어질 때
지나간 과거의 한 자락을 회상하며
젊은 날의 감동적인 완주 기억에
늙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살아가는 지혜의 등불이 필요하거든
나의 달리기가 본보기가 되어
마침내 그들도 달리게 하시고

이 생명이 다하여 사라지는 날
한 평 남짓 나의 관속에
완주메달과 운동화 한 켤레를 넣어
죽어서라도 달리기를 잊지 않게 하여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