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란 세 개,그리고 천 원.-
때는,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올림픽을 치르고 있는 1988년이다.
지금으로 부터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따지고 보면 벌써 이십년이나 흐른 그런 세월 이다. 세월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다더니 요즘은 정말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불과 이십년 정도 지난 세월 인데, 그때와 지금의 생활수준 차이는 엄청나게 많이 나는 것 같다. 지금은 어떤 현장이던 간에 직원이 열 명인 현장은 차가 열대 이상으로 아무리 말단직원 이라 할지라도 자기차를 소유 하고 있고, 또 업무용 차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었다.
현장직원 이십 여명에 소장차를 포함하여 다섯 대 정도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중교통을 이용 하던지 차량이 있는 사람들 에게 부탁하여 일을 보러 다녔지만, 나는 다른 이들 보다 조금 더 빨리 일을 배운 탓에 직원들 중 가장 어린나이에 업무용차량을 지급 받았었다.
지금은 한국조폐공사가 위치해 있는 1단계 조성공사를 1985년도에 시작하여 공정률 약80% 정도 되었을 무렵, 또다시 지금은 한국전력연구원이 위치한 대덕 연구단지 2단계 조성공사를 같은 회사에서 수주하여 현장을 옮기게 되었다.
당시는 문지동과 전민동 모두 합쳐봐야 몇 가구 되지도 않았고, 작은 초등하교 하나에 띄엄띄엄 집들이 있었고, 포도와 배 과수원 들이 주를 이루며, 버스도 하루 몇 번 다니지 않는 곳,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깡촌 이었다.
현장 일이 끝나고 저녁에는 약 삼십 여명이나 되는 홀아비들은 현장숙소에서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차도 없어 시내에도 나가지 못하고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하는데, 나는 차가 있으니 당연 인기가 좋았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가던 술을 마시러가던 나를 끼워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각인 내게는 좋은 일이 많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시내 나가는 버스를 놓쳤다 고 태워 달라고 하는 사람, 곤히 자는 한 밤중에도 누구 한사람이라도 아프면 약을 사 오던지 병원에 태우고 가야되는 일 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이 되면 항상 가장 먼저 일어나는 트럭 기사가 내 옆방에서 잠을 자는데, 그날따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온 그 시간에도 일어나지 않아 확인해 보니 숨을 쉬지 않았다. 잠을 자다가 죽은 것이었다. 그 죽은 송장을 내 애마인 포니 웨곤에 싣고 병원까지 간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내 포니 웨곤은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날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일보를 쓰고 다음날 측량을 위해 좌표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광파기나 GPS측량기는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내각을 측정하여 삼각법으로 좌표를 구하고, 두 점에서의 교점을 찾아 측설을 하는 방법으로, 좌표계산에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항상 미리 내업을 해 두어야만했다.
밤 열 시경, 그날따라 조금 늦게 작업을 마친 철근공들이 현장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사무실을 찾아와 유성까지 태워 달라는 것이다. 이때만 해도 같은 직원이 아닌 현장 종사자들이 이런류의 부탁은 하지 않을 뿐더러 현장 사무실에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을 정도였고, 임금 지불도 자그마한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그런 시절 이었다.
처음 부탁 하는 것이고, “얼마나 난감하면 부탁을 할까?”하는 생각과 일과시간 지나서까지 열심히 일을 했던 터이고, 또 평소에도 열심히 일을 하는 팀이라 태워 주기로 했다. 앞좌석에 한명 뒷좌석에 네 명, 승용차로는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한계 인원이었다.
원촌동을 지나 지금의 엑스포 앞을 거처 유성으로 가는 길은, 거리는 가까웠지만, 문지삼거리에서 엑스포 까지는, 당시만 해도 비포장도로였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의 엑스포아파트와 문지동사무소 앞을 지나는 문지동 고개를 넘어 가는 길을 이용했다. 물론 이 도로도 전체가 아스팔트 포장이 아니라 문지동사무소에서 화암내거리 까지는 군데군데 웅덩이가 움푹움푹 파인 콘크리트포장 도로였고, 이 시간 쯤 되면 지나가는 차량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한 도로였다.
건장한 사내들 여섯 명이 탄 포니왜곤이 힘겹게 문지동 고갯길을 올라 정상에 다다랐을 무렵, 어떤 아가씨가 손을 흔들며 차를 세운다. 이 밤중에 산적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이런 곳에 왠 여자가 있단 말인가?. 거의 도로 중앙까지 들어와 팔딱팔딱 뛰면서 손을 흔드는 터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차를 세우면서 보니까 아가씨 뒤쪽에 택시가 한대 서있었고, 차 유리문을 내리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택시 기사인 듯 한 남자가 다가와
“택시가 고장이 나서 그러니 이 아가씨 좀 태워 주세요”
라고 말 하는 순간 아가씨는 이미 뒷문을 열고 그 비좁은 곳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이미 뒷좌석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네 명이나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가씨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남자들의 무릎위에 앉게 되었다.
차를 출발 시키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이 차가 가는데 까지요”라고 한다.
"우리는 유성까지 가는데요?"
"예, 저도 거기까지 태워 주세요."
무언가 이상 하다는 생각이 들어 룸미러를 통해 아가씨의 얼굴을 살펴보니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다.
이제야 약간의 감이 오는듯하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징이 다른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순진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무슨 얘기를 하면 거의가 그대로 받아들인다. 차속에는 여섯 명이나 타고 있었지만 고개 정상에서의 그 상황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어떻게 된 건데요?"
"대화동 공단에 가자고 했는데 이상한 곳으로 왔어요."
"그럼 그놈이 다른 생각이 있어 여기까지 왔나 보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조금 전 거기서 얘기 했어야지요"
"무섭고 겁이 나서 말 못했어요"
"지금 차를 돌려서 가볼까요?" 하니까
철근팀 최반장이
"지금 가봐야 그놈은 벌써 도망갔을 텐데요 뭐" 하기에,
생각해 보니 그놈은 벌써 원촌동 까지는 갔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적막한 산중에서 어찌 할 수 없어 그냥 유성쪽으로 향했다.
그 아가씨의 나이는 많아 봐야 스무 살 정도로 보였고, 차량 속도를 줄이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대화동 공단에 있는 어떤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주말을 맞아 엄마가 계시는 집에 갔다가 월요일 출근을 위해 공장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이었었다고 한다. 버스도 끊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택시를 탈 수 밖에 없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돈이라고는 단돈 천 원 뿐이 없어, 그 돈으로 택시를 타고 천원어치만 태워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집에서 공장까지는 요금이 얼마나 나오는 데요?”
“천이백 원에서 천 삼백원정도 나오는데 나머지 거리는 걸어서 갈 예정 이었어요” ......
내 기억으로는 당시 택시 기본요금은 육백 원 으로 요금 체계가 지금과는 달랐고, 이삼백 원 정도의 거리는 꾀나 먼 거리였는데, 이삼백 원 때문에 인적도 거의 없는 휴일 밤의 공단지역을 혼자서 걸어가려고 했다는 것과, 얼마나 가난했으면 그 돈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찡해 온다.
택시요금이 천 이삼백 원 나올 정도라면 행정구역상 대전시가 분명 할진데, 이런 시에도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었다.
택시요금이 천원에 다다르자 내려달라고 하니까. 대려다 줄 터이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며 계속 처음 보는 곳으로 차는 달렸고, 택시요금은 이천 원, 삼천 원 계속 올라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이 길로 가도 되니까 좀 기다리라고 하는데, 처음과 사람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되어, 그냥 여기에 내려달라고 했고, 그때부터는 노골적으로 “감방에서 나온 지 3일 밖에 되지 않았다”는 등 서서히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문지동 고개 정상에다다라 아예 차가 고장이 낫다며 길옆에 세우고, 연장을 찾는다며 조수석에 앉아있는 아가씨의 무릎을 만지고 수작을 부리고 있던 차에, 내 차가 거기를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잠시 차 안에는 침묵이 흐른다.....
내 마음만 착잡했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참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는데, 그 분위기를 깬 것이 최반장 이었다
“우리도 그놈하고 같은 사람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이 차를 탓을 거예요”.....
이 한마디가 그때의 공포감에 휩싸였던 분위기와 심정을 말 해 주는 것 같았다.
철근공들을 모두 유성에 내려주고 아가씨만 태워 조금 전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여럿이 있을 때는 공포감에서 벋어 난 듯 보였으나, 단둘이 있으니까 다시 겁을 먹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안심 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남자들은 모두 그 택시기사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대화공단을 가려면 문제의 그 고개를 넘어 문지동 마을을 지나고 현장사무실 앞을 지나, 또 인적이 드문 길을 달려 갑천을 가로지르는 원촌교를 건너야 대화공단을 갈 수 있다.
너무 겁을 먹고 있는 터라 “나는 이런 현장에 근무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또 단 둘이라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현장사무실에 들러 직속 부하직원을 동승시켜 공단으로 향했다. 이 직원도 현장에서는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는 그런 사람으로,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 늘어난 차속의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
이 아가씨가 늘 다니는 방향의 반대쪽에서 공장을 찾는 터라 어디인지 방향감각조차 없는 모양으로 한참을 돌아다녀도 공장을 찾지 못한다.
생각 끝에 대전 시내방향에서 들어오는 공단 입구를 가니, 그때서야 어디인지 알 것 같다하여 공장을 찾아 정문에 차를 세웠다.
“어떻게 사례를 해야 되지요?” 한다.
“그런 것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 주의해서 근무 잘 하세요.”
“제가 가진 것이 이것 밖에 없어서요”
“엄마가 밤에 배고프면 먹으라고 주신 거예요”하며 비닐봉지를 건네준다.
“우리는 이런 것 필요 없고, 또 이러지 않아도 돼요”
“아니에요 이것 밖에 없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하면서
막무가내로 비닐봉지를 차에 두고 공장안으로 사라진다.
현장으로 들어오면서 그 비닐봉지를 들여다보니 삶은 계란 세 개와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있었다. 우리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그 아가씨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이런 엄청나게 큰 것을 받았는데, 마음은 왜 이리 편치 않는지?....
생각해 보면 내 자신도 어렸을 적 먹는 것 걱정하면서 자란 기억이 있는지라 마음이 무거워 지고, 가슴속 무언가가 들어있는 냥 답답함이 느껴진다.
차는 달리고 있는데 둘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차안에는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야, 그거 너 가 가지고 가라”
“아니요 제가 왜 가져가요”
........
“돌려줄 수도 없고 정말 엄청난 것을 받았는데, 버릴 수는 없잖아”
“우리 같이 나누어 먹자”
그렇게 해서 사무실앞 차 속에서 계란을 먹는데,
퍽퍽한 노른자위 때문인지 목이 메어 옴인지 알 수는 없으나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는,
계란 세 개를 그렇게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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