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10일
일산이수정을 돌아보고 서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이라는 이정표가 있어
앞뒤 가릴것도 없이 차를 몰았다.
첫눈에 들어오는 활짝핀 백목련이 환하게 반긴다.
모든 풍경과 피부에 와 닫는 바람도
비가 온 뒤라 상큼함이 더하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 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기예하여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추사의 입춘첩(立春帖)을보고 학예로 대성할 것을 예언,수제자가 되었다.
추사 선생은 1809년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그해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서 수행하고 돌아올때 가지고와 고조부묘 앞에 심은 '예산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181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우도 암행어사,예조참의,성균관 대사성,병조참판을 지내다가 1840년 55세에 당쟁에몰려 9년간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하던중 1844년 59세에 당시 제자인 우상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계적인 작품을 탄생 시키기도 하였다.
<세한도>국보180호
이곳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께서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써 추사선생이 나서 성장한 곳이며,주변에는 추사선생묘,화순옹주묘와 정려문,백송,추사선생이 수도하던 화암사 등 추사선생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있으며,
매년 10월10일에 가까운 일요일에 추사문화제가 열린다.
이 가옥은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는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을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東向)하였고, 사랑채는 남향(南向)하고 있다.
사랑채는 ㄱ자로 되어 별당(別堂)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각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고택 아래쪽에는 "왕자지(旺子池)"라는 유서 깊은 연못이 있었으나 1940년을 전후하여 매몰 되었다고한다.
나를 반기듯 활짝 피어있는 목련은
비 내린후 상큼함을 더하고
기와지붕과 잘 어울려 더욱 더 희게 보인다.
<대문을 들어 서면서...>
사랑채 앞마당에 석봉이라고 쓰여진 돌기둥이 해시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안채>
<선생의 작품들>
뒷뜰은 소박하면서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우물>
선생의 묘는 용궁리 왕자지 위에 있었는데,
1937년 초배부인 한산이씨 묘와 홍주 노은동의 계배 부인 예안이씨 묘를 이장하여
합장 하였다고 한다.
묘 옆의 대나무는 이 지역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겨울의 이상 기후로 누렇게 변해 있다.
<고택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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