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기/마라톤수기

이천사! 춘천마라톤

dalmuli 2006. 8. 24. 08:16
[참가기]-- 조 은 숙 -- 

작년 춘천마라톤 '달리는 사람들'책자에
올해 첫풀을 춘천에서 뛰고싶다는 글을 썼는데
이미 두번의 풀을 뛰어 처녀성은 잃었지만
한번은 춘마에서의 기록 미보유자를 벗어나기 위해
한번은 춘마대비 마지막 LSD 개념이었다.
(아! 변명 힘드네요)

12년전 10월 24일.
그 길고 막연한 연애10년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기도하다.
춘천마라톤대회 하루전
각방을 써 준 남편의 배려에도
결혼식 하루전날의 그 설레임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 4시.
다른때같으면 남편 깰까봐 살곰살곰 들쥐마냥
대회나갈 준비를 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남편이 더 일찍 일어나 설치며
마치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에 대한 대우를 해준다.

'욕심부리지 말고,천천히 즐기면서 뛰고 오라며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쓰라면서
하얀 봉투까지 내미는 것이 아닌가.
받아쥐는 순간 두툼하다.20만원쯤 되려나...
갑자기 감동이 밀려온다. 역시 난 돈에 약하다.

이틀전에 싸 놓은 가방을 다시한번 점검한다.
칩과 배번호와 날씨에 따른 대회복 긴타이즈,반팔,민소매
MP3의 배터리를 다시 점검 점검.


이 팽팽한 긴장감 빨리 뛰어 버렸으면 좋겠다.

2만 5천명.
일찌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결한 장소에 가본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니 처음이다.
내 주변에도 마라톤을 하는 아주 훌륭한 초등학교
동창과 만나기 위해 대여섯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
다같은 풀코스 주자라 작은 대회에서 느끼는 풀코스 주자만의 우월감을
느낄수 없다며 불만아닌 불만을 토로하며
무작정 아는 얼굴들을 찾아 물품보관소로 화장실로
스트레칭도 하지 못한채 실속없는 방황을 하고 다녔다.

오늘 나의 대회 컨셉은 4시간안에 마라톤벽을 만나지 않고
피니쉬라인에서 나도 한번 울어보기.

아직 레이스 조절엔 미숙하지만 초반 오버만 하지 않으면 가능하리라.

출발 총성 15분후
F그룹에서 같이 달리기로 한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 나가다가 칩매트를 밟는 순간
내가 용수철처럼 튕겨 나갔단다.
난 어쩔수 없는 대회용 오버걸인가부다.


그러나 기본소양은 갖춘 마라토너로써 앞지르기는 하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앞 주자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찍는다.

소시적 햇살좋은 가을날 마로니에 공원벤취에 앉아
사람구경하던 취미를 살려
달리면서 앞주자들을 구경한다.
반타이즈와 버프로 멋을 낸 남자주자들도 많은데
키크고 늘씬한 긴머리의 여성주자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달리기를 잘하나,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메이저급 대회 나가면 탱크탑입은 여성주자들이 많다기에
나름대로 민소매 쫄티와 새로 바지도 하나 장만하고 신경 많이 썼는데
뭐 주변 반응은 별로인것 같다.

주변의 끊임없는 이어지는 마라토너들과 같은 속도 같은 호흡으로 달린다.

많은 상념들이 머리를 스친다.
드라마틱하게 하필 오늘이 결혼기념일
연애10년에 천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것 같아 결혼했건만
신혼초부터 이혼위기를 넘기며
첫아이 낳고 심한 우울증에 무기력하게 살아온 날들...
우리 부부는 제일 좋아야 될 시절을 그렇게 서로 할퀴며 살았다.

그도 참 힘들었으리라.
왜 이제와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지...



달리기를 하면서 어릴적 땅따먹기 하듯 내가 확보하는 땅.
내발로 뛰어가는 10km,20km 그 거리만큼
내마음은 넓어지고 여유로워짐을 느낀다.

중간기록을 휴대폰 문자로 보내주는 서비스에 남편 전화번호를 남겼다.
10km 53분
20km 1시간 45분
.........................
행여 중간에 늦어지면 그가 걱정할까봐 열심히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건 나의 오버였다)

즐겁게 천천히 달리기!
최선을 다한 뒤 느끼는 성취감과 자기 만족!
항상 이 두가지 기로에서 망설이지만 오늘은 최선을 다 하고싶다.

그러나 나의 오지랖은 항상 발목을 잡는다.
시각장애우가 놀라지 않도록 도우미 분에게 작은 소리로 화이팅도 외쳐주고
수능대박을 등에 붙히고 달리는 고3 선생님에게도 화이팅
카메라앞에서 살짝 포즈도 취해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의 단 몇초가 내 힘겨운 달리기에 위안이 된다.

30km를 넘어서 MP3의 불륨을 높힌다.
음악을 들으면 주변에 신경쓰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사교성엔 치명적이지만 어차피 혼자 달려가야 할 길.
남은 10km는 평소 달리던 내 달리기 거리에 최면을 건다.
<지금 우리 동네 저수지변을 달리고 있다.
사연있는 무덤을 지나고 있다.>

40여km쯤 달리니 마라톤을 42.195로 정한 사람이 웬수같다.
이 2km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널널하게 달릴수 있을텐데...
그러나 여지껏 달려온 길을 이 2km때문에 망칠수는 없다.
이제 십여분만 달리면 피니쉬라인에서 마음껏 기뻐할수 있다.
나는 오늘 이 기록으로 평생 먹고 살수도 있다.

몸이 힘드니 사고(思考)도 유치해지지만 어쩔수 없다.

연도에 늘어선 인파를 보니 새삼 힘이 쏟는다.
피니쉬라인에서 사진 잘 찍혀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마지막 스퍼트를 하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나의 완주 세레모니.
두팔을 벌려 온 세상을 껴앉는다.




일행들과 닭갈비집에서 일주일간 구경못한 소주를 한잔 마시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휴 또 일찍 들어오라는 전환가...

'자기 기록 내 휴대폰에 문자로 들어왔네.3시간 50분'
조은숙 내가 그럴줄 알았다.얼마나 죽자살자 뗬길래~'

'내 기록이 자기 기록 아녀?그래야 내일 당신 회사가서 말발 서지'
차 막혀서 오늘 안에 못 들어갈거 같은데.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셔'.

'천천히 와'

밤 12시 20분 말끔히 정돈된 집
욕조에 미리 받아놓은 온수와 뜨끈뜨끈하게 덥혀놓은 자석요와
전기밥통에 퍼놓은 밥 한그릇이 준 감동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귀신 달래듯 같이 달리자고 꼬셔도
달리기는 아랫것들이나 하는거라며 달리기 자체를 죄악시 하던 그가
나의 중간기록 문자를 받고 이눔의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도 한번 달려보자며 학교운동장에 나가 25바퀴를 뛰었단다.

무의식중에 나온 거실에서의 세레모니.
두팔을 벌려 그를 껴앉는다.
우이씨~.다 부부동반인데 나 혼자
결혼기념일 기념달리기 하느라 얼마나 외로웠는 줄 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