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0월, 나는 첫사랑과 춘천에
왔었다.
나는 스물한살이었고,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단둘이 떠났던 여행이었기에, 세상을 다 얻은것처럼 행복했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2001년 10월, 나는 다시 춘천을 찾았다.
그날로부터 꼭 10년이 흘러있었고, 스물한살 여대생이었던 나는 서른 한살이 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지만, 이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칠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열정을 가지고 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불같은 사랑이
지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빛나는 것이고 결국은 살아가는 일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춘천에서 나는 생애 처음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려는 것이다.
오래 달리는 일을 좋아하게 되리라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던 나였다. 올 3월에 처음으로 마라톤 연습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600m를 달리고는 멈추어 서버리고 말았다.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꾸준하게, 한결같이 무언가를 해내는 일이 늘 어려웠던 나에게 꾸준하게 한결같이
달릴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10월에, 많은 추억이
어려있는 춘천에서 나는 나에게 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스물한살로부터 10년을 살아온 내 삶이 나에게 그런 힘과
용기를 주었음을 나는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날씨는 맑고 따뜻했다. 풀코스만 만명이 넘게 참가하는 대회장의
분위기에 다소 압도되었지만 나는 이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42.195.. 상상할수도 없는 먼 길.. 정말 달릴수
있을까. 아주.. 아주 힘들겠지, 할수 있을까? 그렇지만 순화야, 꼭 하고 싶다. 내 힘으로 달리고 싶다. 출발선에 서서
나는 다시 내 자신의 각오를 확인하였다. 내 생에 가장 먼 길이겠지만, 가장 멋진 길이 될 것이다. 해보자.
사람들이 달려 나간다. 나도 매트를 밟는다. 시간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젠 되돌릴수 없다. 드디어 시작이다.
사람들의 함성이 들린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시내를 벗어나자 곧 의암호를 둘러싼 길로 접어든다. 호수를 둘러싼
산들은 온통 단풍이다. 하늘과, 호수와, 단풍, 그리고 사람들.. 아름다운 풍경이다.
의암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그 넓은 호수 전체를 달리는 사람들이 완전히 한바퀴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본다.대단한 광경이다. 그 무리
어디에서부턴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함성소리가 사람들을 타고 파도처럼 밀려온다. 호수전체가 달리는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들로 일렁인다.
내 주변을 달리는 사람들 모두 발걸음이 가볍다. 이제 시작이고 그들 모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 한껏
고양되어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될것이다. 바로 거기부터 진정한 마라톤이 시작되는 것이다.
15k가 지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연습이 부족한 사람들이 차츰 뒤로 쳐진다. 나도
왼쪽 무릎 아래가 뻐근하게 당겨온다. 호흡도 좀처럼 편안해지지가 않는다. 멈추어 서서 소염제를 뿌리고 스트레칭을 한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내 몸과 의지를 조화시켜 달려야 한다. 세상의 시간은 잊어버리자. 나는 내 시간속을 달린다.
하프지점 못미친 곳에서 2시간 가까이 함께 달린 동료가 무릎통증으로 뒤로 쳐진다. 먼저 가라고 손짓하는 그 모습을
몇번이고 뒤돌아보며 달린다. 출발에서부터 2시간 가까이 의지하며 함께 달렸던 분인데, 마치 전쟁터에 남겨두고 혼자 떠나오는
심정이다. 사람들 속을 혼자 달린다. 함께 호흡을 맞추며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나를 외롭게
한다.
하프지점을 지난다. 무릎 통증은 사라졌지만 몸은 이미 고단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2주전 강화대회에서 32k를 뛰고
골인하자마자 쓰러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라톤은 시간을 단축하는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끝까지 자기몸을 조절하며, 자기의 의지와
상황과, 자기사진을 조절하여 최선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과정 이라는 것을 강화대회를 통해서 배웠다. 힘들지만 욕심내지 말자.
지금부터가 처음이다.
25k를 지난다. 몸이 점점 힘들어진다. 길가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한번 앉으면
절대 일어설수 없다. 잔듸위에 누워있는 사람도 보인다. 나도 눕고 싶다. 그러나 골인한후, 그때 눕자. 회송차량이
지나간다.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대부분 의자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있거나, 표정없는 얼굴로 달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본다.
그들 역시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달리고 싶다. 다시 힘을 낸다.
32k를 지난다.
이 이상의 거리를 나는 달려본적이 없다. 여기서부터가 처음이다. 다시 시작이다. 내 주변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 모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얼굴들이 피곤함과, 고통이 서려있다. 이 시간대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으로
풀코스를 달리는 사람들 이리라. 그들 모두 침묵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힘겨운 고통속에서 자기 자신속에 깊이
침잠해 있는 그들의 지친 표정속에서 나는 일종의 경건함을 느낀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속을, 자신의 의지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35k를 알리는 팻말을 지난다. 다리가 뻣뻣하다. 의지는 더 빨리 달릴수 있다고 나를 다그치지만, 두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다. 걷는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나는 그저 움직이고 있다. 기울어진 햇살이 내 앞을 비춘다. 11시에 출발해서 4시간이
지났으니 햇빛이 이울때도 되었구나. 신기하지 순화야. 이렇게 오래 달리고 있으니, 너는 여전히 달리고 있으니..
도리없이 멈추었다가 걷는다. 1k가 너무 멀구나. 걷다가 다시 달리려고 하면 무릎과 관절들이 찌르는것처럼
아프다.그러나 곧 마치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달리고 있는 것처럼 네 몸은 곧 달리는 모양을 찾는다. 속도도 없이, 그저 모습만
달리고 있다.
38k다. 4k만 더 가면 끝이다. 그러나 모든 힘은 이미 소진되었다. 나는 다만 태엽을 감아놓은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 오후의 시내에 접어들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난다. 이미 교통통제가 풀린 도로는
그저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몇몇은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고, 대부분은 무심한 얼굴로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그들속에 있지만, 나는 그들속에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 길위에 있을 뿐이다. 쉬고싶다..쉬고싶다.. 쉬고싶다는 생각이 내 모든
감각을 채운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오후가 기울어가는 낮선 거리에서 나는 땀과 먼지로 얼룩진 유니폼을 입고, 고장난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내안의 신순화를 달래며 울고 만다.
41k 지점에서 먼저 들어온 동료를 만난다. 내가
염려했던 사람들이 이미 골인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드디어 종합운동장이 보인다. 이미 완주한 사람들이 메달을 걸고 내 옆을
지난다. 이제 이 고단한 여정이 끝나겠구나.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믿을수 없는 힘이 다시 나를 채운다.
동호회 사람들이 한둘 보인다.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해준다. 나는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손들 들어 보인다.
트랙으로 접어든다. 나는 더 한층 기운차게 달린다. 힘없이 달리고 있는 여러 주자들을 제치고, 나는 즐겁게, 힘차게
내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골인점을 향해 달려간다.
거기에 10년 전의 내가 웃고 있다. 10년 동안..
신순화..너.. 잘 살아 왔구나.. 그녀가 거기서 나를 반겨준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힘껏 손을 들고 골인매트를
밟았다.
5시간 14분..
내 생에 첫 완주다.
고통스런 시간은 지났다. 그대로 잔듸위에 누워 나는
믿을수 없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고맙고, 또 고맙다. 내가 고맙다.
10년만에 다시 찾은 춘천에서 나는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는 길을 달렸다. 잊을수 없는 멋진 경험이었다.
다섯시간이 넘게 먼 길을 달린 오늘의 기억은 내 모든
근육과 세포 구석구석 새겨질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내 의지와 이성이 약해지고, 희미해질때, 그땐 몸이 기억하고 있는 오늘의 힘과
용기가 나를 이끌어 갈것이다.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42.195k를 달렸던 힘으로 너는 네 삶속에 더욱 깊이 들어갈 것이다.
마라톤은 힘들다. 그러나 특별하고, 멋진
일이다. 그 먼 길을 달리는 동안 누구나 가장 가까이 자기 자신속에 이르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나는 내가 달린
모든 길을 사랑한다.
내 앞에 남아있을 더 먼 길들도 오늘처럼 내 힘으로 한결같이 달리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달릴 것이다.
춘천대회 3일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해 3월부터 마라톤을 시작한 나는 그 해 10월 춘천에서 처음으로 풀코스를 달렸다. 같이 달릴 수 있는 남자를
만나기를 소원했던 나와 지금의 남편을 더 가깝게 이어준 건 달리기였다. 달리면서 우리는 연애를 했고, 함께 달리는 거리가 길어질 수 록 사랑도
깊어졌다. 5월에 커플 마라톤대회에선 나란히 10킬로를 완주하고, 6월에 결혼을 하였다. 9월엔 한강마라톤대회에서 하프를 함께 완주했다.
그리고 10월... 춘천에서 나란히 풀코스를 완주해서 부부 마라토너가 되는 것. 올해 우리가 이루고 싶은 가장 큰 꿈이었다.
바쁜 신혼생활 틈틈이 서로를 격려하며 달려왔다 . 그런데 임신이라니.. 내 나이가 서른 둘이고, 남편 나이가 서른 일곱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으나 춘천대회를 준비해 왔던 나로서는 다소 당황스런 일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고, 나는 남편과 함께 뛰는 것을
접었다. 마라톤을 시작한지 1년 10개월만에 나는 처음으로 골인점에 서서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으로 마라톤을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태연하게 혼자서 해보겠다고 했다. 나보다 훈련량이 부족한데다, 풀코스는 처음이다. 그러나 남편은 씩씩하게 웃어 보이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마라톤을 하는 여자를 만나,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남자. 이젠 그 남자가 여자가 기다리는 골인 점을 두고 홀로 달리려 한다. 가슴이
찡하다.
운동장은 달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날씨도 춥고, 바람마저 부는데, 색색의 옷을 입고 환호를 하고 있는 그들은 모두가
용기 백배해 보인다. 드디어 함성소리와 함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달려나간다. 수천 수만의 용기, 의지, 꿈들이 거대한 강처럼 함께
흐른다. 처음으로 나는 스탠드에 서서 이 도도하고, 엄청난 흐름을 지켜보았다. 출발하는 그 마음, 그 다짐, 그 두려움과 설렘, 하나하나 내가
겪는 것처럼 가슴이 저려온다. 거대한 흐름 속에 하나의 흐름이 되어 남편은 달려나갔으리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남편이 달려야 하는 그 멀고 긴 길을 생각해 보았다. 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간 운동장에서 이제 그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또 다른 마라톤이 시작되고 있었다. 날이 차다. 전광판에서는 힘차게 달리고 있는 등록선수들의 모습을 비춘다. 잠시 바라보다가 남편을
생각했다.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처음 5킬로가 가장 힘들텐데.. 지난번 하프 대회에서도 10여 킬로부터 남편은 걷고 싶어했었다. 잘 견디고
있을까.
출발 후 세시간이 가까워오자 본격적으로 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골인점에 서 서 주자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끝없이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기뻐하며, 감격하며, 혹은 너무나 힘겹게 탈진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표정과 사연들을 품고 마지막
길을 달려 들어온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달려나간다. 얼싸안고, 함께 달려주고, 격려를 한다. 모두가 뭉클하고 감동스런
장면이다.
아. 나는 비로소 마라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배번호를 달고 달리는 것만이 마라톤을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마라톤은 선수만의 잔치가 아닌것처럼, 그 길에 서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수만의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달리고 있을 남편과, 아내, 엄마와 아빠,
동료와 친구를 성원하며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라톤을 이루고 있다. 그 사람들이 있기에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끌어올려 먼길을 달려 올 수가 있는 것이다. 먼 길을 달리는 사람들도 벅차고 감격스러우나, 그 먼길을 달려오는 이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도 벅차고 소중하다. 달리는 한 사람 한사람마다, 그 사람을 염려하고 완주를 기원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그 사람을
끌어 주고 있다. 언덕과 비탈길, 고통스러운 먼 길을 지날 때 그 마음들도 함께 그 언덕을 넘는다. 그러니 길위를 달리는 2만의 러너들은 수만,
수십만의 마음들이 끌어주는 거대한 사랑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마라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크고 깊은 감동이다.
나는 골인점에서
그 마음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강하고 아름답게 하는지 보았다. 한사람 한사람 마지막을 향해 달려올 때, 반가운 얼굴을 찾아 보여주는 그
아름다운 미소에서 나는 그 사람을 달려오게 한 사랑을 보았다. 손을 잡고 달리는 아이 어쩔줄 모르며 옆으로 뛰고 있는 아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동료들. 수천, 수만의 사랑들이 길 위에 어우러지고 있었다. 42.195의 사랑.. 길고, 멀고, 깊은 사랑.. 나는 그 한복판에서
먹먹한 가슴을 하고 일렁이는 감동을 느낀다. 그 사이로 내 사랑도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풀코스를 완주한
기록은 5시간 13분이었다. 남편도 그 무렵에 들어올까. 어쩌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다섯시간이 넘어섰어도 사람들의 물결은 쉼 없이
이어진다. 바람이 점점 차가와 진다. 다섯시간 삼십분이 지나자 들어오는 주자들도 눈에 띄게 지쳐 보인다. 조금씩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다.
남편은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길을 따라간다. 어떤 표정일까. 얼마나 힘이 들까. 내 마음을 남편 옆에 두고, 함께
달려본다. 많이 힘들텐데, 춥지는 않을까. 여섯시간이 넘어서자 운동장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한층 더 어스름이 깔리고, 바람은
한층 추워졌다. 뱃속의 아이도 조금씩 염려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한 두 명씩 계속 들어오는 주자들 가운데서 남편을 찾았다. 얼마나
늦어지든 들어만 왔으면.. 하는 마음 한편에 혹 무리한 달리기로 몸이라도 상하지 않았을까.. 평소에도 무릎이 좋지 않았었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는 마음이 조금씩 타 들어갈 때..
누군가 내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남편이었다. '36킬로까지 달리다..
회수차 탔어. 걸어서라도 골인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찬바람 속에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애서.. 포기했어. ' 추위와 고단함으로 지쳐 보이는
얼굴로 남편은 미안한 표정을 보였다. 얼룩진 유니폼, 어깨와 팔뚝에 소금기가 서려 있었다. 남편의 시계엔 다섯시간 이십 몇 분이 찍혀 있었다.
하프 이상을 달려본 적이 없는 남편은 생애 처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달렸던 것이다. 나는 남편을 끌어안았다. 그저 다시 돌아와 준 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몸이 상하면서까지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이 고마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애기를 위해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준
것이 고마웠다. 남편은 최선의 최선을 다한 것이다. 36킬로까지 버티어 준 것도 기다리는 나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마음 하나로도 나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춘천대회가 끝나고 남편은 사무실로 메일을 보내왔다.
- 여보. 춘천대회를 꼭 완주하여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생각같이 잘 안되더군.
5시간이 넘도록 뛰다 걸으면서 많은 걸 생각했었어. 하프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회수차량을 기다리고 있었지. 나도 그 무리에 끼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레임에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어. 하지만 교통해제가 풀리고 공사중인 도로를 걸으면서 점점 약속을 지킬 수 없어짐을 생각했지.
추운 날씨에 기다리는 당신을 생각하면 그냥 버스에 몸을 실을까 몇 번이나 생각하면서 "타실래요?"라는 유혹을 거듭 거듭 사양했지.
내 뒤로 몇몇의 주자들만이 점점이 보이는 것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걸으며 뛰었지. 4시간 30분이 넘었을 때 30킬로를 지나면서
이제 12킬로만 더 가면 된다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고관절과 발바닥의 통증을 이를 악물며 견뎌보았는데..... 36킬로를 지날 무렵
마지막 회수차 라며 유혹이 시작되었지. 추운데 기다리는 당신을 생각하며 한참을 망설이다 회수차에 올라 버렸어. 회수차를 타고 얼마
가지 않은 지점-아마 소양대교 건너 당신이 말한 그 지루한 직선 주로 중간쯤일꺼야- 한 무리의 주자들이 걸으며 뛰며 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었지. 조금만 더 뛰었다면 저 사이에 끼어 완주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도 들었지만 아직은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인 것을
인정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또 한가지는 당신과 함께 뛸 때와 혼자 뛸 때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 당신의 존재는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는 커다란 힘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였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당신도 잊지 않았으면 해.
다시 한번 당신과 함께 주로 에서 뛸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하루빨리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몸 추스리고 건강한 우리아기를 위해 우리 더 사랑하고 노력하자. 우리의 아기에게 풀코스 완주를
첫 번째 선물로 주고 싶었지만 이번엔 36킬로라는 중간의 선물로 대신할게.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완주라는 선물을 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당신이 내 곁에 있는 한...... 고마워 여보. 사랑해. -
새삼 눈물이 핑 돌았다. 다섯시간이 넘도록 36킬로까지
악전고투하며 달렸을 남편의 모습과 심정이 느껴졌다. 남편이 달리는 길에 내가 있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결국 내내 함께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멀고 힘든 거리를 달려내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가장 깊은 용기와 희망,
진정한 자기애에 바탕을 두고 마라톤이 주는 모든 고통과 환희, 좌절과 기쁨, 그 엄숙하고 벅찬 경험들을 모두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 길을 달리는
모든 주자들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연대감을 체험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살이의 지혜와 겸손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최고와,
최선, 한계를 알아간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더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 우리의 생이 그렇게 살아가는 무수한 조각들이 이루는 하나의
빛나는 무늬임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2002년 10월 춘천에서 우리는 함께 완주하리라는 서로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신뢰와 사랑을 확인했다. 새로 생긴 생명과 더불어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을 끝까지 함께 달릴 든든한 파트너로서 서로의 가슴속에 더
깊은 닻을 내렸다. 남편이 남겨둔 6킬로는 함께 달려 완성할 몫으로 남겨 두었다. 여전히 함께 할 목표가 있으니, 남은 날들도 행복할 것이다.
2002년 춘천에서 내가 만난 것은 42.195라는 길고 먼 거리만큼, 깊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도전과, 사랑, 감동과 눈물이 있었던 춘천에서
이제 나는 언젠가 남편과, 내 아이와 모두 함께 달리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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